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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아내에 대한 일기

D+30,31일(05.20,21) “그렇게 집에 오고 싶어 했는데, 편해?” “응. 편해!”

by 뚝밑아이 2017. 5. 21.


20. 아침부터 어제 부축 없이 걸었다는 설아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거의 정상인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침부터 설아는 집사람의 시력에 관심이 많다. 건양대병원에 들러서 의사에게 다시 여쭈어보아야 한다고 별렀다. 본인이 아니면 환자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니까 엄마의 서명을 위조하면 된다는 것이다. 남편인 내가 보아도 집사람의 서명이나 설아의 서명을 구별할 수 없었다.

처형의 간병을 어찌 보아야0 할지 고민이다. 일반 간병사에 비하여 집사람이 더 안정감을 가지고 대하며, 집사람이 먹을 간식 등을 많이 만들어 오시는 것이다. 어찌 그런 사랑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을까? 기어이 돈으로 계산한다면 12시간 간병사의 수고료와 같이 보아야할 듯하다.

서울 동생이 형수를 보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단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묘지를 만들어보라고 강경동생한테 이야기하고 확인도 하지 않은 무관심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2:30에 재활병원에 도착하기로 하고, 10:30에 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기 전에 자동차 트렁크에서 스틱을 꺼냈다. 스틱은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오르는데 지팡이로 사용하고, 산소에서 잡초를 낫처럼 쳐냈다. 키 큰 잡초만 쳐낸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절을 하면서 뇌었다.

그리고 공주로 돌아 유성으로 향했다. 그 길이 가까운 것이다. 정확히 12:30에 도착했다.

처형이 집사람 식사를 돕고 계셨다. 쌀밥은 건드리지 않고, 떡국만 먹고 있었는데, 정상인이 보기엔 적게 먹는 듯했다. 토요일은 임시시간표에 의해 재활치료를 했는데 열심히 참여했단다. 컨티션이 퍽 좋아진 듯하다.

우리가 늦게 도착하여 밖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잠을 잤다.

모두 돌아와서 내가 흔들어 깨웠다. “외손자가 왔는데 잠만 잘 거야?” 그래? 어디 안경 좀 줘봐!” 하며 쓰나마나한 안경을 쓰고, 윤재를 얼러보려 했다. 윤재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할머니를 반가와 할 리가 없지만, 포기하지 않고 윤재를 불렀다



그러다 재미가 없어져 또 잠을 청했다.

그런데 팔과 다리를 걷어보니 발진이 모두 사그라졌다. 퍽 다행이다. 그러면 선치과병원 제조 약을 다시 먹을까? 하고 물어보니 입안의 따가움도 많이 줄어들었단다. 그럼 모두 잘 되었다며 그 약을 아주 끊어버리자고 했다.

모레 원광대 진료의뢰서와 갖춰올 필요한 서류, 결재 방법 등을 안내 받았다. 그리고 외출은 하면서 허가를 득해야 한단다.

틈이 좀 나서 종택이에게 전화를 헀더니 꺼져있었다. 문자를 보내고, 한시간 정도 지났을까? 종택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난 목요일 여덟 번째 수술을 했단다. 아직도 을지대 병원에 있으며, 2주 후면 퇴원할 생각이란다. 더 이상 묻지는 않았지만, 여덟 번이나 수술했다는 것은 발목을 절단하는 최악의 상태로 가지 않았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재원이가 19:00까지 남기로 하고, 내 동생은 내가 서울행 고속버스로 배웅하고 집에 돌아오기로 했다. 설아 내외는 대전 친구네를 거쳐 집으로 온단다. 오늘은 자동차 세대를 모두 동원하였다.

 

21. 일요일 오전엔 처형이 목사님으로서의 하실 일이 많아, 우리 가족이 맡기로 했었다. 그런데 간병사도 두 시간 더하여 09시 까지 돌보아 주시기로 하셨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래서 재원이가 08:00에 출발했다. 좀 늦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08:50에 우리가 구입한 슬리퍼가 없어졌다고 전화가 왔다. 누가 모르고 착각하고 신었을 것이다. 재활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병상련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짓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일반슬리퍼를 신고 올라가라 일렀다. 그리고 늦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식사는 그럭저럭 반 정도 드셨단다. 아직 입맛을 되돌리지 못한 것이다. 처형이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 놓았지만, 흥미를 많이 갖지 못하고 있다. 재원이도 서울로 올라가야 쉬고 내일 출근할 것이다. 13:00에는 보내주고 싶었다.

09:30에 김유순씨가 오기로 했는데,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가, 5분전에 오셔서 같이 나갔다. 성당 마당에 들어서니 명신씨, 미순씨, 금진씨, 양영숙씨, 석주엄마 등 많은 사람들이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윤여길 선배님도 성당 문 앞에서 정장차림으로 부동자세로 서계셨다. 유순씨는 인계를 해 주시고 어디론지 가셨다.

선배님은 재작년부터 나를 인도하여 영세를 받게 하고, 당신이 대부가 되는 것을 소원처럼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지나갔지만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몰랐다.

오늘은 선배님을 따라 성당 가운데로 들어갔다. 미사 시작에 앞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 미사가 시작 되었지만, 나는 선배님만 따라 했다. 기도문은 모르니까 침묵하고, 동작만 따라 했다. 영성체를 받을 때에 나는 팔짱을 끼고 앞에 나가니 신부님은 머리에 손을 언지시었다. 영세를 안 받은 사람이 여럿이었다. 오늘은 예비자(성당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위한 미사란다.

성가는 어색하지만 책을 보고 작은 소리로 따라 불렀다. 성가를 부를 때 안내를 할 때도 있지만, 천정 구석에 전광판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미사를 끝내고, 마리아관으로 환영회를 하러 갔다. 30명쯤 된다는데 서너 명은 빠진 듯하다. 일요일 오전반과 수요일 저녁반이 나뉘어 있었다. 수요일 반은 열 명 정도 되는 듯 했다. 신부님과 강사님, 각 반의 보조교사님 등을 소개 했다. 기억력이 쇠진하여 어떨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기로 홀로 다짐했다. 다과회를 마치고 나니 12:00이 되었다. 집으로 왔다. 그런데 가슴에 달았던 꽃송이가 온데간데없었다. 값비싼 건 아니지만 나에게 의미 있는 꽃이라는 생각으로 오던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성당 안의 마리아관 앞까지 가 보았지만 출입문은 잠겨 있고, 꽃송이는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오고 말았다.

강경 제수씨가 오셔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낮에 오는 줄 알고 왔던 것이다. 집사람이 좋아할 시래기된장국을 했다. 저녁 때 집에 오면 먹여보란다. 그리고 시금자 죽도 끓였다. 정성이 고마운데 집사람이 그에 보답할지 의문이다. 제수씨는 저녁에 다시 오기로 하고 집으로 가셨다.

우린 제수씨가 마련한 점심을 잘 먹고 병원으로 향했다. 14:30이나 되었다. 설아는 외출증을 떼어가지고 왔다. 우리는 준비를 하고 현관으로 나왔다. 재원이는 서울로 향하고 나는 집사람을 뒷좌석에 길게 뉘고 집으로 왔다.

먼저 내리게 하고 차를 지하에 주차하고, 집에 들어오니 안방에서 누워있다.

그렇게 집에 오고 싶어 했는데, 편해?” . 편해!”

그리곤 내내 잠만 자려 하고 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밥상을 차려놓고 일어나기를 종용했다. 피곤하여 잠이나 더 자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제수씨가 음식은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7시에 작은아빠랑 오신댔어, 잘 먹나 보려고.” 마지못해서 식탁에 앉았다. “거긴 자기자리가 아닌데?” 그냥 가까운 곳에서 먹게 그냥 둬!” 아직도 귀찮은가?’ 속으로 그리 생각했지만 식탁에 앉은 것만도 큰맘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제수씨가 동생과 같이 왔다. “형님, 찰밥 해 왔어, 드셔봐!” 껄끄러운 잡곡밥보다 나은 모양이다. 조그만 그릇이지만, 시래기 된장국과 함께 다 먹었다.

밥을 먹고 식구가 다 모여 커피를 마셨다. 집사람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지만, 소파에서 분위기를 맞추었다. 오랜만에 옛날 분위기를 되찾았다. 그러다가 동생 내외를 일찍 보냈다. 그러자 현관에서 인사하고는 곧장 소파에 드러누웠다.

나는 오늘 성당에서 받아온 놀뫼두레(성당의 주보)를 안경과 함께 보여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큰 글씨를 읽던 집사람이 물었다. 어디를 읽으란 말이야?”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기도합시다. 류기환 프란체스카.” 대상자 여섯 명중 두 번째로 올라와 있는 자기 이름을 찾고 읽었다. 주보의 작은 글씨까지 읽었다. 피곤하지만 시력도 이정도면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교리시간이 두 가지 있는데 어느 반이냐고 물었다. 일요일 아침반과 수요일 저녁반이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수요일 저녁 반으로 했다니 잘했다고 한다. 저녁을 먹을 여유가 있다고 한다. 사고력도 어느 정도 찾은 듯 했다.

김금진씨도 왔느냐고 묻고, 송석문 선생님이 그렇게 가신 후로 무서워 집에서 잠을 청할 수 없다는 말도, 성당에 입문한다는 말도 잊지 않고 하였다. 그러고 보면 기억력도 점점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간 이내 안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날 이후 침대에 등을 붙여보지 않았지만, 오늘은 잠시 후 옆에서 같이 자야겠다. 내일을 위해 빨리…….

그런데 설아가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침대위에서 자유롭게 주무셨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리고 제가 바닥에서 어머니를 지켜야 한단다. 참 착한 딸을 잘 두었다. 나는 다시 거실로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