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L 사진/2019

종묘(宗廟)에 가 보았다.

뚝밑아이 2019. 5. 15. 12:03

5월 9일. 종묘(宗廟)에 가 보았다.

종묘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인 상태에서 2시간 여유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문밖에서 월남 이상재 동상이 있어서 한 컷 잡아보았다.


 



외대문(外大門) : 종묘의 정문.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함. 정문 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는데 확인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문이 열리지 않고 관계자들만 드나들었다.

한분께 왜, 못 들어가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매표소에 가 보니 경로우대는 무료란다. 한 시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단다.

다행이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10분쯤 뒤 15;20에 해설사가 나왔다. 내가 맞추어서 온 것처럼 들어갔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 주황색 글씨 : 많은 정보를 아래어서 복사함.

곡선이 없는 곳종묘길을 걷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종묘.    김정봉(jbcaesar)     등록 : 수정 | 2012.08.06 09:43


종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이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국립 사당(祠堂)이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과 백()으로 분리돼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사당()을 지어 혼을 모시고 무덤()을 만들어 백을 모신다.

이 중 왕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종묘라 한다종묘는 무덤(宗墓)이 아니라 사당(宗廟)이다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므로 사방으로 둘러싸이게 했다. 지세가 약한 남쪽에 인공으로 가산(假山)을 조성해 종묘 안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않고 신기가 오래 머물도록 하였다. 가산은 종묘에 3군데 연못을 조성하면서 나온 흙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길이 종묘를 안내한다.

종묘의 정문은 창엽문(蒼葉門)이다. 잎이 우거진다는 '창엽'은 후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종묘의 건축의지가 문에서부터 드러나 있다. 문에 들면 끝이 안 보이는 박석길이 맨 먼저 들어온다. 나무와 연못, 인공으로 조성한 가산이 양옆의 시야를 막는다.


박석 길을 신로(神路)라 한다

신로는 가운데가 약간 높고 양옆이 조금 낮은 세 가닥 길이다. 가운데 길은 혼령과 향·축문이 들어가는 신향로(神香路)고 동측의 길이 왕이 다니는 어로, 서측의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다


박석으로 깔려있는 신향로(神香路) 위에서 잡아 보았다.

해설자가 신로라고 관람자는 그 길로 걷지 않는 것이 좋겠단다. 그래서 촬영만 하고 내려왔다.



박석(薄石)에 대한 미학적·철학적·과학적 해석


종묘에는 얇고 넓은 돌인 박석이 여러 곳에 깔려있다.

신로도 모두 박석으로 돼 있고, 정전과 영녕전 앞마당 모두 박석이다.

박석은 예전부터 민간에서 사용하여온 아주 친숙한 건축 재료다. 그렇다면 왜 종묘정전이나 영녕전 마당에 박석을 깔았을까. 우선 선조들은 박석을 물 빠짐이 좋고 흙이 씻겨나가 터를 훼손되는 것을 막아주는 아주 좋은 건축 재료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학적이면서 다분히 미학적 해석으로, 화강암을 반듯하게 깎아 마당을 덮으면 빛을 흡수하지 못하고 반사해 눈이 부시게 되는데, 박석은 표면이 거칠어 빛이 들어도 반사하지 않고 흡수하여 눈부심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표면이 거칠기 때문에 걸을 때 조심해야 하므로 몸가짐을 바로 하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해석도 있다


종묘는 직선이다

한국의 미를 선적인 요소에서 찾는다면 단순하고 간결하며 엄숙미가 있는 것은 직선이다.

종묘에서는 곡선 보다는 직선이 보인다. 직선이야말로 죽은 자를 위한 엄숙한 공간에 잘 어울린다. , , 지붕, 기둥 열에서 직선이 보인다.

종묘 정문부터 신로는 직선으로 북쪽을 향해 길게 뻗어 있다. 재궁 앞에서는 담을 따라 직선으로 꺾여 있다.

곡선으로 휘어지지 않는다. 정전의 기둥은 둥글긴 하나 둥근 기둥의 줄은 직선이다. 엄숙하다 못해 장엄하기까지 하다.


공민왕 신당쪽에서 잡은 인공연못이다.




망묘루와 공민왕 신당은 지나쳤다.

망묘루(望廟樓) : 향대청 남쪽에 위치하며, 제향(祭享) 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는 곳.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공민왕 신당 : 망묘루 동쪽에 있는 별당으로 고려31대왕 공민왕을 위하여 종묘 창건시에 건립되었다고 전함.


향대청에 들어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향대청(香大廳) : 종묘에 사용하는 향((()와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



재궁(齋宮) : 임금이 제사를 준비하던 곳. 정전 동남쪽에 위치. 어숙실(御肅室)이라고도 함. 재궁 북쪽에는 임금이 머무는 어재실(御齋室), 동쪽에는 세자가 머물던 세자재실(世子齋室)이 있고, 서쪽에는 왕이 목욕하던 어목욕청이 있음.



어재실엔 임금의 의자만 덩그러이. 놓여있었다.




   동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홀로 남신문쪽으로 돌아가다가 모퉁이 공신당 앞에서 정전을 보고 한 컷 잡았다.


공신당(功臣堂) : 조선 왕조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곳.

칠사당(七祀堂) : 인간의 삶과 생활에 관여하는 일곱 신을 의미하는 칠사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




그리고 이내 남신문 쪽으로 와서 신로와 계단, 검은색 박석 신로와 정전을 잡아 보았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정전의 전체 모습과 박석 마당, 가운데 신로를 잡아 보았다.   사람이 없을 때 찍으려고 몇 번을 시도했다.


정전(正殿) :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신 곳. 종묘의 중심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太廟)라 부르기도 함.



남신문 밖으로 나와 찍어보았다.

수복방이나 전시청, 제청은 위치만 살펴보고 난 지나쳤다.

정전 수복방(正殿 守僕房) : 종묘를 지키고 제사를 돕는 낮은 계급의 관리나 노비가 지내던 곳.

전사청(典祀廳) : 제례 때 사용하는 그릇이나 물건, 운반기구 등을 보관하고 음식을 준비하던 곳.

제정(祭井) : 향제(享祭)에 사용되는 우물. 정전 전사청 동쪽에 위치.


정전 서문을 지나 영녕전으로 향했다.

영녕전(永寧殿) : 조선 태조의 선대 4조 및 종묘의 정전에 봉안되지 않은 조선 역대 왕과 그 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곳.

그곳에서도 남신문 안에서 박석 마당과 선로를 포함한 영녕전 전체의 모습을 잡아 보았다.




정전과 달리 중앙부분 4칸의 지붕이 높게 솟아있었다.

그리고 두컷을 이어 넓게도 잡아보았다.




영녕전 남신문(南神門) 밖으로 나와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남신문에 기대어 영녕전 전체와 박석 마당, 중앙 검은색 신로의 모습을 잡아 보았다.

그곳에서 해산을 하여 시간을 보니 16:20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나오면서, 정전과 영녕전 악공청(正殿永寧殿 樂工廳): 종묘제례시에 주악하는 악사들이 대기하거나 연습하던 곳이 있었지만, 바빠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딸에게 전화를 하고 아주 급히 돌아와, 어린이집에 가 보니 16:57이었다. 다행으로 혼자서 다짐해왔던 17:00은 넘기지 않았다.

손자가 습관처럼 놀이터를 가잔다. “세 가지만 타고 오자!” 억지로 약속을 하고, 사람이 적은 아래쪽 놀이터로 데리고 갔다. 세상에 나온 지 80일 밖에 되지 않은 준재가 감염이 되어 조심해야한다.

20분 정도 후에 잠시 후 집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