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6,47일(06.05,06) 토요일 오전에 퇴원하기로 잠정 작정했다.
6월 5일. 오늘은 09:00에 원광대학병원으로 향했다. 10:20으로 예약되었기 때문이다. 문앞에 내려주고 주차를 한 뒤에 2층으로 올라가보았다. 그래도 예약 시각이 안되어 기다렸다가 부름을 받고 들어갔다. 집사람에게 이것저것 문진을 했다. 어지러움 증세와 맛을 느끼지 못하는 증세, 모두 있을 수 있는 증세란다. 재활치료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환자의 의지를 더 중요하게 보며, 중지를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다. 퇴원을 하고 싶어하는 집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말이었다. 나오면서 원광대 안과의사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필요하면 예약을 하고 진료를 받아 보란다. 집사람은 선치과병원도 가고 싶어 했지만 약이 있다고 찾아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대전으로 와서 처형 처제들과 점심을 먹었다. 오랜만에 제법 많이 먹은 듯하다. 식사 후 우리 모두 깊은 고민에 빠졌다. 퇴원을 언제 할 것인가? 또 간병사를 언제까지 모실 것인가? 그 뒤로는 간병을 어찌할 것인가?
고민 끝에 간병사는 수요일까지, 그 이후는 처형과 설아가 하루씩 밤을 새며, 주간에는 처형과 설아, 내가 나누어서 돌보기로 했다. 그리고 토요일 오전에 퇴원하기로 잠정 작정했다. 간병사가 오셔서 말씀드렸다. 저녁이 배달되었지만 아주 조금만 먹었다.
6월 6일. 오늘은 현충일이다. 조기도 10시가 되어서야 달았다. 오늘은 나들이로 현충원에 다녀오기로 다짐했다. 출발하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져 국기를 거두라 일렀다. 오늘은 또 공주에서 처가의 이종 아들의 결혼식이 있어 다녀서 병원에 가기로 했다.
10:40에 출발하니 11:10에 식장에 도착했다. 주차안내원도 없고 구역도 만만치 않아 교회정문 앞에 주차를 했다. 주로 걸어오는 손님과 버스로 오시는 손님이 많았다. 의환이 처 외사촌 형님을 찾았다. 처제 내외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요행이 같은 시각에 힘들이지 않고 만났다. 2층에 올라가 처이종사촌(서승님)을 만났다. 신랑 조성효도 만났다. 스물여섯의 헌칠한 청년이었다. 재원이보다 11년이나 빨랐다. 장가들지 못한 아들을 둔 애비의 마음을 부럽게 하였다.
식사를 하고 병원에 가야하기 때문에 예식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유성으로 향했다. 40분이면 충분했다.
의환이 처 외사촌 형님과 함께 왔다. 집사람이 보고 매우 반가와 했다. 3시쯤 대전현충원을 가보고 싶었지만, 처이종사촌들이 들른다는 연락이 왔다. 공주 예식장에 왔다가 유성 집사람을 보러 온다는 이야기다. 기다리다 이종사촌들을 만나보았다.
오늘도 잠자던 시간을 맨 정신으로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 시간여 동안 대화를 하다, 16:00에 세분을 유성터미널로 모셔다 드렸다. 두 분은 대전에 사시는 분으로 집으로 가셨다.
돌아오자마자 사진연구회장님이 16:30에 오신다는 메시지가 왔다. 시간여유도 없이 방문객을 맞았다. 회장님은 총무님과 함께 오셨다. 말로만 듣던 집사람의 차도를 목격하고 안도의 느낌을 가지고 가셨다.
잠시 후 처남 내외분이 또 왔다. “뭐 하러 이렇게 자주 와?” 올케가 몸이 불편한 것을 걱정하며 하는 말이다. 정말로 관절이 약해 고생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주변에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기도 그러한 처지에 놓여있었는데, 남편의 신속한 배려로 살아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나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 고맙다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정말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인지 반성을 해 보았다.
아직 쾌차한 게 아니고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의 치료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간병사가 오자 빨리 집에 가란다. 오늘은 꾸물거리다 그리 빨리 가는 것도 아니다. 천천히 달렸다. 잠시 물이 고인 포장도로 위에서 흔들렸지만 속도를 줄여 집까지 무사히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