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일(04.22) 날씨 맑다. 집사람이 말을 했다.
오늘은 준비가 좀 늦었다. 10:15분에 출발했다.
서울 처 외사촌이 오기로 했단다. 벌써 오고 있을 것이란다. 차를 가지고 오실지 버스를 타고 오실지 몰라 전화도 못했다. 연락이 왔는데, 버스가 길이 막혀 지연되고 있단다. 면회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어쩔 수 없었다.
문틈으로 살피더니 수액이 여러 개 달려 있었는데 한 개 밖에 안 보인단다. 우선은 좋은 징조로 보고 시간이 되어 들어갔다. 입에 하얀 거즈를 물고 코를 골며 자고 있다. 할 수 없이 듣기만이라도 하라고 이야기 했다.
“여보, 친구들과 성당 신부님도 빨리 일어나라고 기도하고 있대. 어서 일어나.”
입에 물고 있던 거즈가 떨어졌다. 도로 넣어 주려니 눈을 떴다.
깜짝 놀랐다.
“나 보여? 정신이 들어?” 하고 질문을 했다.
“여기가 어디야?”
“원광대병원이야! 며칠 전에 이리 온 거야!
집사람은 “왜 진작 오지 않고, 지금 왔어?”고 했다.
집중치료실의 면회시간을 말해주고, 저녁때 다시 올 거란 말도 해 주었다. 아직 상황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 어떠랴. 집사람이 말을 했다.
“재원이는 언제 왔냐? 설아는 어디 있냐?”는 둥 아이들을 찾았다.
설아도 오고 체제도 와서 얼굴을 보고 이야기 했다.
발음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의사표시는 하였다. 얼마니 기쁜지 몰랐다. 유나와 처제도 면회를 마쳤다. 그때 김유순씨가 수녀님을 모시고 왔다. 설아가 면회를 두 명씩 밖에 할 수 없으므로, 잠시 저지를 하다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5분여동안 말씀을 나누셨다. 면회 종료시간은 다가오는데, 서울 외사촌 오빠는 오지 않았다. 조마조마하고 있다 수녀님이 나가시고 다시 들어갔다. 오른손에 묵주가 들려 있었다. 김유순씨가 간호사의 허락을 받고 들려 주셨단다. 신앙심이 대단한 분이다.
몸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양손과 발을 침대에 묶어놓았는데, 약간의 움직임은 있었다. 그리고 다리를 자꾸 움직이며 이불처럼 덮어놓은걸 걷어 내렸다. 몸의 움직임도 정상에 가까워 온 듯하였다.
면회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안내원의 말이 있었지만 설아가 의사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으며 시간을 지연시켰다. 그런 땐 설아의 탐구심을 높이살만 했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그때 외사촌오빠가 서울에서 도착을 했다.
면회시간이 지났다고 했더니 저녁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어차피 한 번에 끝내려는 오빠는 아니었지만 고마웠다. 그러자 문이 열려서 얼른 들어갔다. 관리하던 분도 보이지 않는다. 설아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했다. 그때 까지도 설아가 의사와 면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외사촌 오빠가 그때 도착하실 걸 알고 그런 건 아니지만, 같이 면회를 했다. 면회시간이 10분은 지연된 시각이었다.
면회 대기실에서 수녀님을 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집사람이 성지 답사 과정에서 “나는 사진작가 부인"이라고 합덕성당을 촬영했다는 것이다. 빨리 나아서 합덕성당에 같이 사진 찍으러 가자고 말하면, 벌떡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성당에 같이 나오라고 하며 약속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점심을 먹자고 하니, 수녀님과 유순씨 내외는 다른 방향으로 헤어졌다. 우리 식구끼리 점심을 먹었다. 여러 메뉴를 시켰는데 아들이 계산을 하려는 걸 처제가 뺏어서 계산을 했다.
점심을 먹으면서 외사촌 오빠가 하는 말이 환자가 사람 차별을 한단다. 말인 즉은
설아에게는 밥 먹었니? 하고 묻더니 오빠에겐 약해 빠진 사람이라고 나무랐단다.
약해 빠진 사람이란 가정불화를 잡지 못하고 있는 오빠를 나무라는 말이었다. 그걸 보면 기억력도, 순발력도 정상적으로 있어 보인다.
커피를 한잔씩 먹고 처제와 잠시 헤어졌다. 고속도로로 가서 양정에서 처형을 미팅하고 윤아를 내려놓은 후 논산으로 오기로 했다.
처제가 어제 보고 간 남동생에게 의식이 돌아와 이야기도 했다는 말을 하니까, 대학교수님이 전화를 받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참 우애가 깊은 오누이다.
집으로 오기 전에 동생에게 알렸다. 뒤늦게 알리는 것도 양해를 구했다. 이따 저녁에 오겠다고 했다. 면회 시각을 이야기 해 주었다.
집에 도착했다. 잊기 전에 컴퓨터 앞에 앉아 정리를 했다.
집사람의 일기 오늘은 반이 지났지만 커다란 소득을 얻은 듯하다.
처형제가 모두 오서서 외사촌과 함께 여덟 명이 상을 두 개 펴놓고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외사촌 오빠가 내 방으로 와서 금일봉을 내놓으셨다.
19:20에 가기로 하고 나갔다. 기백이 차로 가기로 했다. 길을 아는 사람이라고 내가 조수석에 앉았다. 뒷좌석을 펴니 8명이 앉을 수 있었는데 일곱 명이 앉아서 갔다. 씽씽 너무 잘 달려서 뒤에 앉은 사람은 불안해했다. 나는 내운 전 습관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자주 다니지 않은 밤길을 그리 빨리 달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집사람이 옆자리에 앉아 항상 잔소리처럼 하던 때가 생각난다.
40분 만에 도착하여 들어갔더니 20시가 넘어 식당가 문을 닫았다. 기백이는 저녁을 먹지 않았는데, 집에 가서 열시나 되어야 밥을 먹을 텐데 배고프겠다.
로비에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자 대기 장소로 갔더니 사람이 별로 없었다. 20여분을 기다리는데 참 지루했다. 내 동생은 처갓집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처가 식구들은 더 모여서 여덟 명에 이르렀다. 모두 열두 명이었다. 우리 집 가족이 항상 많다. 내가 빚을 많이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되어서 제일 먼저 명부를 작성하고 동생과 들어갔다.
쿨쿨 잠들어 있었다. 목소리를 높여 잠을 깨웠다. 한참 깨우니 눈을 떴다. 하루에 두 번씩 밖에 면회를 할 수 없는데, 식구들을 만나야 할 게 아니냐고 눈을 뜨라고 했다. 짧은 시간을 잠들어 있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동생도 인사를 나누었다.
손을 주물러 주었다. 식구들이 많이 와서 길게 면회할 수 없다고 하니 누가 또 왔느냐고 물었다. 동생들과 서울 외사촌 오빠도 왔으니, 내가 나가야 들어올 수 있다고 말하고 동생과 같이 나왔다. 동생과 설아가 들어왔다. 밖에서 보니 재원이는 열심히 주무르고 있고 설아는 간호사와 또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식구들이 문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30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팀의 수가 많아서 줄을 서서 기다리니까 감독하시는 분이 재촉하여 교대를 도와주었다. 모두 면회를 마치니 시간이 거의 되었다. 내가 다시 들어가서 내일 다시 오마고 이야기 하며 나왔다. 그 뒤로도 시간이 넘었는데 재원이와 설아가 들어가서 나오질 않았다. 재원이가 엄마를 주물러 주는데, 내가 시간이 지났으니 나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기다려야 했다.
5분 정도 시간이 지나서 아이들이 나왔다. 나중에 각자 나눈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자기가 왜 병원에 와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재원이 돈을 마련해 갚아주어야 한다는 기억까지 하고 있었다. 기억력은 어느 정도 살아 있어 보인다. 그런데 현황 파악을 아직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만질 때쯤 되면 까까중머리를 보고 얼마나 놀랄까, 그리고 자기가 뇌출혈로 병원에 들어온 것을 알면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 크다.
말을 타면 마부를 두고 싶다는 속담이 생각이 난다. 정신이 들어오니 별 사치스런 생각을 한다고……. 정말 사치일까?
로비를 나오며 동생이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아무리 형수지만 처가 식구들은 여덟 명이나 왔는데 저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해도 혼자 온 것이 미안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내일 태균이 하고 오겠다고 했다.
육촌 호환이 동생이 다녀가며 위로금을 주었다. 당숙님도 어제 기십만원을 하사하셨는데, 모두에게 미안하다.